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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의 탄생> 2.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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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의 탄생] – 2. 르네상스 | 라이트브레인 블로그

[타이포그래피 스터디]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2편 타이포그래피 스터디 시리즈로 연재되는 본 글은  『타이포그래피의 탄생』책 내용을 토대로 핵심 내용을 정리, 요약하였습니다. 글쓴이의 덧붙임 문장 앞에는 *을 별도 표기하였습니다. <타이포그래피의 탄생> 로빈 도드 Robin Dodde 지음 르네상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지속된 르네상스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혈기왕성한 변화를 겪은 기간으로, 중세를 마치며 현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단계이다.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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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스터디]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2편
타이포그래피 스터디 시리즈로 연재되는 본 글은  『타이포그래피의 탄생』책 내용을 토대로 핵심 내용을 정리, 요약하였습니다.

 

<타이포그래피의 탄생> 로빈 도드 Robin Dodde 지음

 

 

 

 

2. 르네상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지속된 르네상스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혈기왕성한 변화를 겪은 기간으로, 중세를 마치며 현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단계이다.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르네상스 시대 배경 (14~16세기)

신에서 인간과 자연 중심으로 옮겨가며, 교황권이 약화되었다. 르네상스는 "재탄생, 부활"이라는 의미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 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인문주의, humanism). 이탈리아에서 비롯된 르네상스의 정신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르네상스 시대는 과학 혁명의 토대가 되어 중세와 근세를 이어주는 시기다.

 

- 예술의 중요성 부각 (레온 바티스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보티첼리 등)

- 국제 무역의 발전으로 유럽의 경제 성장 시대로 진입

-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1.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활자

: 초기 간행본 시기 (요람기), 대량 인쇄의 시작

유럽에서는 아직도 활자를 이용한 인쇄기법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가 1440년과 1450년 사이 처음으로 활자를 이용하여 책을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많은 양의 책이 경제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대량생산 체계를 발명한 데 있다. 그의 발명은 현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1. 조절 가능한 활자 주조기

: 구텐베르크의 위대한 업적, 텍스투라체를 기반으로 한 <42행 성서>

구텐베르크의 빛나는 업적은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이용하되 이를 필요에 따라 적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혁신적인 발명은 거푸집의 넓이를 알맞게 조절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이는 각각의 글자에 맞는 거푸집을 만들어야만 했던 기존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타이포그래피에서 구텐베르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1455년 완성한 <42행 성서>다. 이는 손으로 쓴 책의 형태를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모방해냈다. 이는 독일 북부의 공식적인 서체인 텍스투라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독일 공식 서체인 텍스투라체를 기반으로 인쇄되었다.

 

 

 

 

1-2. 초기 출판시대

: 국제무역의 발전과 인쇄기술의 확산

당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두 대주교 사이의 전쟁으로 마인츠는 심각한 경기침체를 맞이했고, 시민들은 자치권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인쇄업자들은 마인츠를 떠나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했다. 이들의 방랑은 유럽에 급속도로 인쇄기술을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유럽에서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영향력을 키우며 국제무역 중심지로 자리 잡은 베네치아나 로마 교황의 고향이자 서유럽 기독교의 중심지인 로마로 향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캑스턴(1422~1491)이 처음으로 인쇄를 소개했다. 그는 독일 쾰른에서 인쇄 기술을 공부한 뒤, 1475년 브뤼헤에서 영어로 된 <트로이 역사집>과 <체스 두는 법>을 인쇄하였다. 이듬해,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인쇄소를 시작했다. 그때 영국에서 처음으로 인쇄한 책은 <철학자들의 금언, 1477>이었다.

 

 

 

1-3. 고딕체에서 로만체로

: 고딕 중세시대를 대변하는 '블랙레터체' vs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따른 '로만체'

초기 북유럽 인쇄에서는 고딕 블랙레터체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유럽 남부 인본주의자들은 블랙레터체가 중세시대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져 불만을 가졌다. 이탈리아 필경사들은 공문서용 글씨체인 칸첼라레스카(Cancellaresca)를 사용했다. 고전적 로마의 영향을 지니며 프랑스 카롤링거 왕조풍의 필사체 스타일을 재현한 것이지만, 훨씬 가볍고 흘림체의 특징이 두드러져 있다. 1465년, 새로운 심미적 관점을 고려해야 했던 인쇄가들은 인본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스크립트체 영향을 받아 화이트레터 경향의 활자를 만들었다. 이는 텍스투라체보다 더 가벼운 캘리그래피적 형태로써 풍부한 로만체 디자인으로 첫 도약을 딛었지만 여전히 고딕체의 영향도 간직한 상태였다.

 

인쇄 초기, 중세시대를 대변하는 '블랙레터체' / 출처: LG그룹 블로그

 

인본주의 필경사들이 사용하던 스크립트체 '칸첼라레스카'

 

 

 

1-4. 기술에서 예술로

: 가장 탁월한 로만 서체의 탄생, 니콜라 장송

라틴어 글자꼴의 진정한 최초 표본을 처음 만든 이는 니콜라 장송(1420~1480)이다.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는 장송을 마인츠로 보내 활자를 사용하는 새로운 인쇄술을 배워 오도록 명했다. 하지만 그는 베니스에 도착해 인쇄소를 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인쇄를 했다. 장송의 활자는 글자로 단어를 만들면 편하게 어울리는 맞음새뿐 아니라 글자꼴 자체가 지닌 아름다운 비율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15세기 베네치아로 건너간 장송은 베네치아 인쇄업자와 활자 조각가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활자 디자인을 기술에서 예술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프랑스 판화가, 출판업자, 활자 디자이너 니콜라 장송(1420~1480)
장송의 로만체 활자

 

 

 

2. 알두스 마누티우스와 이탈리아 올드페이스

알두스 마누티우스(1449~1515)는 로마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그는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문학에 대한 지식이 고대 문화에 대한 진가를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이라 믿는 인문주의자였다. 베네치아에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모인 그리스인들이 하나의 거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들은 마누티우스가 서적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초상

 

 

 

2-1. 초기 텍스트들

: 마누티우스의 놀라운 재능과 그리포가 가진 뛰어난 기술의 만남

출판업자 마누티우스는 그리스어 글꼴을 개발해 출판에 사용하기 위해 볼로냐의 활자공인 프란체스코 그리포의 판화 기술을 이용했다. 그들은 그리스어 글꼴을 디자인하기 위해 더 공식적인 필사본의 필기체 대신 당시 베네치아의 캘리그래피 손글씨체를 사용했다. 그리포의 활자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다른 그리스어 활자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로만체와 같은 찬양을 받진 못했다. 15세기 말, 마누티우스는 라틴어 판본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그리포는 피에트로 벰보의 라틴어 텍스트 <아이트나 화산에 대하여 De aetna>에 사용하기 위해 활자를 만들었다. 이 활자는 인쇄의 역사에 마누티우스와 그리포의 이름을 올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495년, 벰보체로 초판된 피에트로 벰보의 <아이트나 화산에 대하여 De Aetna>

 

 

 

2-2. 이탤릭체

: 포켓북에 담기 위한 좁은 문자

마누티우스는 포켓북 형태의 판본을 위해 그리포에게 그가 만들었던 그리스어 활자와 비슷한 개념으로 인본주의자들의 글씨체를 본뜬 글꼴을 만들도록 했다. 당시 로만체는 대문자에만 사용했으므로 소문자들만 모아 놓은 이 글꼴이 오늘날 우리가 이탤릭체라 부르는 형식의 글꼴이다. 이는 글자가 차지하는 폭을 좁혀 인쇄물 비용과 무게를 고려할 때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런 라틴어 문고 시리즈들의 주 대상은 학자나 연구가들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편하게 들고 다니며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문고판 시리즈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1501년 마누티우스가 전부 이탤릭체로 이루어진 그의 첫 번째 8절판 고전 문학책을 생산해냈다. / 출처: Typecast by Monotype

 

 

 

3. 벰보체, 이탈리아 올드페이스

: 고전 로만 알파벳에 대한 그리포의 고도로 숙련된 해석

벰보체는 크고 넉넉하며 풍부한 형태가 특징으로 본문에 사용하면 밝아 보인다. 세리프가 크지만 까치발이 섬세하게 다듬어져서 글자에 탄탄한 토대를 부여한다. 어센더가 대문자보다 높아서 소문자의 높이(x-height)가 작아보이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이탤릭체는 획의 굵기와 세리프의 뚜렷한 변화로 펜 글씨 같은 느낌을 준다. 마누티우스와 그리포의 글꼴은 성공적이었다. 무난하고 쉽게 읽혀서 실용성이라는 인본주의적 가치에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현해낸 아름다움은 정교한 장식이 아니라, 활자 디자인이 지닌 구조와 페이지의 비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벰보체의 특징 / 출처: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embo_sample-2.svg)

 

 

 

3-1. 벰보체 부활

: 벰보체를 부활시킨 스탠리 모리슨

벰보체의 부활은 일련의 역사적 글꼴을 정리하고자, 모노타입사의 스탠리 모리슨(1889~1967)의 지휘로 진행되었다. 그 대상으로 그리포가 만든 글꼴 두 가지가 거론되었다. <꿈속의 사랑을 위한 투쟁, 1499>의 폴리필루스체와 <아이트나 화산에 대하여 De Aetna>에 쓰였던 벰보체였다. 폴리필루스체가 1923년에 먼저 공개되었고, 원본의 불규칙적인 속성을 상당 부분 간직했기에 신뢰성 있는 디자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벰보체는 1929년까지도 제작되지 않았지만 현대적인 접근이 이루어졌다. 불규칙한 속성들이 제거되고 대문자가 가벼워졌으며 세리프가 다듬어졌다. 20세기 내내 벰보체는 매우 잘 만들어진 본문용 글꼴이라고 알려졌고, 안정감 있고 우아한 형태 덕분에 여러 가지 책과 대중 매체에서 널리 사용되는 인기 폰트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본문용 글꼴로 취급하긴 했지만 디지털화된 덕분에 제목용 글꼴로 벰보체를 사용하는 것도 아주 효율적이다.

 

 

 

4. 클로드 가라몽과 프랑스 올드페이스

: 프랑스 북 아트의 황금시대

16세기, 프랑스 인쇄산업은 이탈리아가 갖고 있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이 시기 주요 인쇄업자로는 시몽 드 콜린, 장 드 투른, 로베르 에스티엔, 그리고 최초의 왕실 인쇄공 조프루아 토리가 있다. 이 시대는 인쇄업자가 무엇을 인쇄할지 결정하는 시기였으므로, 인쇄・출판업자들은 그리스와 라틴문학의 고전까지 섭렵하여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 인쇄산업의 진일보에 공헌한 것으로는 클로드 가라몽의 글꼴이 있었다. 가라몽은 로만 글꼴 사용을 주장했던 인본주의 학자이자 인쇄업자였던 앙투완 오제로의 도제였다. 파리에서 가라몽은 몇몇 인쇄업자들과 일하다가 로베르 에스티엔이 펀치세트를 의뢰하며 도제생활을 마치게 된다. 가라몽은 독립할 기회를 얻어 프랑스 활자 제조가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클로드 가라몽

 

1592년에 인쇄된 가라몬드체 / 출처: 위키피디아

 

 

 

4-1. 균형 잡힌 세트

: 우아하고 품격 있는 세리프 글꼴의 원형, 가라몬드체

가라몽은 프란체스코 그리포에게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 올드페이스에서 세련된 정제를 더했고, 로만체와 짝을 이룰만한 대문자가 있는 이탤릭체를 조각했다. 대문자와 소문자가 이탤릭체와 어우러지는 조합과 균형으로 인쇄업자들은 사상 최초로 종합적이고 균형잡힌 글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라몽의 글꼴이 성공한 것은 질 높은 디자인뿐 아니라 탁월한 기술 덕분이기도 하다.

 

가라몬드체 특징 / 출처: https://medium.com/@thelittlereina/typeface-garamond-be1b8b01add8

 

 

 

5. 크리스토퍼 플랑탱과 네덜란드 올드페이스

: 성서 출판의 선구적 인물 플랑탱의 <대역 성서>

클로드 가라몽이 세상을 떠난 후, 크리스토퍼 플랑탱이 가라몽의 펀치와 활자를 대량으로 사들인다. 플랑탱은 제본 업자로 경력을 쌓으며 파리에 오래 머물렀고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부상을 당해 제본 업자 경력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인쇄와 출판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안트베르펜에 정착했을 때, 그곳은 당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학자들을 불러 모아 방대한 양의 학술서적을 출판했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다.

특히 리옹의 로베르 그랑종은 플랑탱의 시빌리테 글꼴(당시 손글씨에 기초를 둔 프랑스식 이탤릭체) 몇 가지에다 플랑탱의 명작 <대역 성서>를 위해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활자를 제공했다. 대역 성서는 본문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칼데아어, 시리아어로 되어있는 여덟 권 분량의 대규모 출판물로, 스페인의 왕 필리페 2세의 후원을 받아 1569년부터 1572년 사이에 생산한 책이다.

 

1569년 플랑탱이 발간한 성경책 /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imeji&logNo=221039277693

 

 

 

5-1. 네덜란드 전성시대

1589년 플랑탱의 사후 그의 사위 요하네스 모레투스가 사업을 이어받아 아들 발라싸자에게 넘겨주었다. 모레투스가는 1867년까지 인쇄업을 계속했다. 프랑스 인쇄업의 전성기가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된 데에는, 넓게 봤을 때 플랑탱-모레투스 가문과 이후 17세기 엘제비르 가문의 공이 크다.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는 네덜란드의 유명 활자 제조가에 대한 수요가 컸던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1913년 모노타입사가 발표한 플랑탱 글꼴은 플랑탱의 후계자들이 사용했던 로베르 그랑종의 글꼴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플랑탱체는 다른 올드페이스에 비해 땅딸하고 엑스하이트가 커서 광택 있는 종이에 인쇄하기 적합하다.

 

 

 

 

 

<요약>

 

블랙레터 (1450)

   - 고딕 중세시대를 대변하는 글꼴

   - 대량 생산 체계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텍스투라체

 

로만체 (1470)

   -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상을 바탕으로 실용성 중시

   - 이탈리아 인본주의자들 중심

   - 로만체의 표본을 만든 니콜라 장송

 

이탈리아 올드페이스, 벰보 (1496)

   - 알두스 마누티우스와 프란체스코 그리포

   - 본문용에 적합한 실용적인 서체

   - 20세기에 모노타입사 스탠리 모리슨에 의해 부활

 

이탤릭체 (1501)

   - 포켓북에 담기 위한 소문자 기울임꼴

   - 마누티우스와 그리포에 의해 등장

   - 후에 가라몽이 대문자가 있는 이탤릭체 조각

 

프랑스 올드페이스, 가라몬드 (1526)

   - 클로드 가라몽

   - 균형 있고 세련된 서체

 

네덜란드 올드페이스 (1569)

   - 크리스토퍼 플랑탱 <대역 성서>

   - 20세기에 모노타입사가 플랑탱체 발표

 

 

 

 

 

참고 서적

로빈 도드, 『타이포그래피의 탄생』, 홍시&홍디자인(2010), p28~67.

 

참고 자료

나무위키,  https://namu.wiki/w/르네상스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르네상스

세계기록유산관, "구텐베르크 42행 성경" 이미지 http://theme.archives.go.kr/next/kor/main.do?menuCode=M2000203&right_num=1

wikiwand,  http://www.wikiwand.com/ko/니콜라_장송

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6, https://wol.jw.org/ko/wol/d/r8/lp-ko/2006842#h=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