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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스터디]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6편
타이포그래피 스터디 시리즈로 연재되는 본 글은 『타이포그래피의 탄생』책 내용을 토대로 핵심 내용을 정리, 요약하였습니다.
<타이포그래피의 탄생> 로빈 도드 Robin Dodde 지음
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에 독일이, 8월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점령했다. 연합군이 독일의 수도이자 소비에트 연방 주둔 지역인 베를린을 분할하면서, 독일은 동쪽의 독일 민주공화국과 서쪽의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시대 배경 (20세기 중반~후반)
- 제 2차 세계대전 영향: 표준화에 의한 생산성 향상, 생산공정 단순화
- 냉전시대: 유럽국가 간 이념 대립과 정치적 혼돈,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미국 이주
- 대중문화운동의 성장: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 전달
- 전통 가치에 반항하는 청년문화의 역동성과 움직임
- 미국: 실용주의, 공업 성장, 전문 광고 회사들의 활동
- 스위스: 국제주의 양식 (장식 배제, 강한 대비, 규칙성, 객관성, 명확성), 모던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의 연장선
- 이탈리아: 문화적 전통, 디자인의 다양성 존중, 반문화 디자인, 다품종 소량생산
- 독일: 체계적 디자인 정책, 객관적 아름다움 (기능적 디자인), 절제된 양식
- 북유럽: 개성, 풍토적, 문화적 공통점, 수공예와 산업 생산의 장점을 살리는 조화 (스웨덴: 공공디자인, 유니버설 발전 / 덴마크: 협회 중심 굿디자인 운동 / 핀란드: 간결, 과감한 전위적 디자인)
1. 막스 미딩거와 헬베티카
: 스위스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서체 '헬베티카'
하스 활자주조소의 책임자인 에두아르드와 알프레드 호프만이 막스 미딩거에게 현대화에 적합한 산세리프 서체 디자인을 제안했다. 1956년, 막스 미딩거는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체를 토대로 만든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를 발표했다. 이 서체가 1961년 독일의 스템펠 사를 통해 소개되면서 스위스를 강조하는 현재의 헬베티카(Helvetica)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이미 입지를 굳힌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체의 영향 때문에 그리 사랑받지 못했지만, 다른 국가에서는 헬베티카체가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 철학을 담고 있다는 호평과 함께 사랑받았다. 이것이 스위스 국제 스타일의 기준이 되었고, 국제적 목적에 보다 적합하다고 인정받았다.
1-1. 헬베티카체
: 디자이너들이 사랑하는 중립적인 서체
모더니스트 타이포그래퍼들은 전통적 타이포그래퍼들처럼 본문에 쓰는 활자는 가능한 한 중립적으로 사용해 독자들이 글을 읽는 데에 영향을 적게 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체와 헬베티카체는 모두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헬베티카체는 본래 스위스 국제주의 양식을 연상시키는 글꼴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대중적인 글꼴이 되었다. 명료하고 읽기 쉬우며 그 핵심을 잘 전달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과 목적에 두루 사용되어 왔다.
2. 국제주의 스타일, 유럽에 미친 영향
: 문제를 해결하는 객관적이고 조직적인 해법 제시
잘 알려져 있듯 스위스 스타일과 국제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은 1930년대 신 타이포그래피에 기초한 바우하우스와 더 스테일,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 이 운동은 타이포그래피의 그리드와 산세리프체 텍스트, 촘촘함, 텍스트의 왼쪽 단 정렬, 그리고 삽화보다 사진의 이용 등으로 체계화된 방법들, 통일성을 통해 복잡한 정보를 쉽게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신 타이포그래피의 스위스 모델은 유럽에서 널리 관심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장악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1950년대 들어서 타이포그래피와 레이아웃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스위스 국제주의 양식이 새로운 이론적 발판이 되었다.
2-1. 프랑스의 스위스 디자이너
: 장 위드메르
장 위드메르(Jean Widmer)는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스위스 디자이너로 꼽힌다. 그는 1940년대 말 취리히 예술공예학교 학생이었다. 1972년 그는 비주얼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를 열고, 퐁피두 센터와 오르세 미술관 등 여러 가지 그래픽 아이덴티티 작업을 진했했다. 위드메르는 그림의 성격을 지닌 글꼴의 잠재된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활용했다.
2-2. 독일 실천 주의자들
: 오틀 아이허, 빌리 플렉하우스
국제주의 스타일의 실천 주의자였던 독일 디자이너로 오틀 아이허(Otl Aicher)와 빌리 플렉하우스(Willy Fleckhaus)가 있다. 아이허는 뮌헨의 조형예술학교 졸업생으로 울름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는 1955년 울름 조형대학의 공동 창립자였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그래픽 디자인 부서의 아트디렉터였다. 그의 글꼴 로티스체(Rotis)는 산세리프체, 세리프체, 세미세리프체의 세 가지 관련 형태를 한 자족으로 제시한 첫 글꼴이었다. 빌리 플렉하우스는 잡지 디자인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1959년 뮌헨에서 시작된 청년문화 잡지 <트웬 Twen>에서 선보인 아트 디렉팅이 대표적이다. 플렉하우스는 그리드를 이용해 현란한 레이아웃을 만들었다. 좁고 꽉 짜여 있는 단에서 본문으로 가득 찬 페이지로 옮겨가며, 극적으로 잘린 사진으로 동종 출판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각적 효과를 창조해냈다.
2-3. 영국과 네덜란드
: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 앤서니 프로샤우그 /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그룹 'De Stijl'과 'Total Design'
영국은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19세기 슬랩세리프체가 반짝 유행을 탔다. 모더니즘에 적대적인 영국이었지만, 1950년 후반 무렵에는 스위스의 영향이 감돌았다.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와 앤서니 프로샤우그(Anthony Froshaug)를 들 수 있다. 스펜서는 타이포그래퍼이자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논쟁 거리를 제공했던 계간지 <타이포그래피카 Typographica>의 편집자였다. 그는 1952년에 모던 타이포그래피를 영국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쇄사업의 디자인 Design in Business Printing>을 출판했다. 프로샤우그는 교사이자 타이포그래퍼로 영국 추상회화 작가들의 영지였던 콘월에서 몇 년간 작은 인쇄소를 경영했다. 그는 1950년대에 교수직을 맡으며 학생들에게 영국 미술학교 특유의 분석적인 정신을 가르쳤다.
네덜란드는 20세기 초반에 전기 모더니즘의 최전방에 있었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테오 반 되스부르크는 더 스테일의 원동력이었고, 바우하우스와 긴밀한 영향력을 주고받았다. 전후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전문분야에 걸친 디자인 컨설턴트 토털 디자인(Total Design)에서 국제주의 양식이 나타났다. 1963년에 설립된 토털 디자인의 창립 구성원들은 그래픽 디자이너 빔 크라우얼(Wim Crouwel)과 베노 비싱(Benno Wissing), 산업 디자이너 프리소 크라머(Friso Kramer)였다. 그들은 대담하게 구획된 레이아웃에 순수하고 상큼한 색채를 결합시켜 늘 예측 불가능한 활기를 더했다.
3. 아드리안 프루티거와 포토 산세리프
: 사용자 중심적 글꼴 디자이너, 프루티거
20세기의 주요 글꼴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아드리안 프루티거(Adrian Frutiger)는 1928년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태어났다. 그의 경력은 주조활자와 사진 식자술, 디지털 식자술의 시대를 아우른다. 프루티거는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체가 산세리프를 대표했던 환경에서 훈련받은 디자이너였다. 그는 취리히의 예술 조형 학교에서 수학하며 1952년에 파리의 드베르니 페뇨사에 아트 디렉터로 들어갔다. 당시 드베르니 페뇨사에서 제2세대 사진 식자기였던 포톤・루미 타입 사진 식자기를 위한 글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에서 산세리프체가 한 종류 필요했고 푸투라체가 유력한 후보였으나, 프루티거가 기회를 잡아 자신의 디자인을 제안한다. 그 결과 유니버스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3-1. 유니버스체
: 숫자 시스템으로 체계화한 폰트 패밀리
프루티거는 일관된 디자인 원리와 심미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굵기를 지닌 서체를 만들고자 했다. 서체 굵기를 숫자로 분류한 프루티거의 시스템(첫 번째 숫자가 문자의 두께를, 두 번째 숫자는 길이와 위치를 나타내는 방식)은, 유니버스 이후 등장한 서체들에 영향을 미쳤다. 유니버스체는 헬베티카체나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체에서 일탈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휴머니스트 느낌이 담긴 네오 그로테스크 글꼴이다. 유니버스체의 훌륭한 특징은 겸손함에 있다. 목소리가 뚜렷한 제목용 글꼴의 자질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매우 효율적인 두께 폭으로 그 점으로 보완했고, 본문용 글꼴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4. 헤르만 차프와 팔라티노체
: 완벽하고 정교한 타이포그래퍼이자 천부적인 캘리그래퍼
헤르만 차프(Hermann Zapf) 역시 20세기의 위대한 타이포그래퍼로 손꼽힌다. 그는 격동기였던 1918년, 독일 뉘른베르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차프가 열 살이 되던 해, 국립 사회당이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정치적 전과기록을 갖게 되면서 그가 원했던 전기공학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인쇄소 기술자로 일하던 차프는 유명한 캘리그래퍼이자 활자 디자이너인 루돌프 코흐의 작품 전시회에 가게 된다. 그가 이 전시 관람을 계기로 캘리그라피와 활자 디자인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가 루돌프 코흐의 아들인 파울 코흐와 같이 일하며 본격적인 서체 제작과 인쇄 관련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군대에 가게 된 그는 지도 제작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프랑스로 옮겨가 스페인 지도를 만들고 편지의 글씨를 쓰기도 하며 그의 캘리그래피에 대한 섬세함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캘리그래피를 가르치던 차프는 이듬해 스템플사 인쇄 부서의 아트 디렉터로 일했다.
4-1. 캘리그래피에 대한 애정
: 캘리그래피에 대한 차프의 지식과 애정
팔라티노체는 1948년 헤르만 차프가 만든 최고의 글꼴이다. 팔라티노체는 두꺼운 펜에서 비롯된 형태에 대한 감상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다른 올드페이스 활자 디자인처럼 16세기 글꼴을 재작업한 것은 아니다. 팔라티노체는 오히려 16세기 로마의 대작가 조반바티스타 팔라티노의 작업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에 대한 차프의 존경심을 담아 팔라티노라고 이름 붙인 그 글꼴은 20세기 인쇄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제작된 활자였다.
4-2. 팔라티노체
: 가독성을 뛰어넘는 특별함
20세기 세리프의 대표적인 서체로 손꼽히는 팔라티노체는 가독성이 굉장히 뛰어나다. 본문용 서체가 갖추어야 할 적절한 굵기와 아름다운 비율로 만들어진 소문자의 높이, 디테일하게 다듬어진 서체의 형태로 다른 서체에 비해 본문에서 더 잘 읽힌다. 또한 팔라티노는 가독성을 뛰어넘는 특별함이 있다. 오랜 기간 캘리그라퍼로서 실력을 쌓은 헤르만 차프의 실력이 십분발휘되어 펜글씨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획의 방향과 굵기, 끝맺음의 높은 완성도가 알파벳 글자 하나하나에 살아있다. 전체적으로는 돌에 새겨진 글자와 같이 단단한 균형미와 위엄이 서려있다. 팔라티노체는 절제된 아름다움과 함께 모던한 형태 디테일 등 시대를 뛰어넘는 서체의 완성도와 밸런스가 기본에 충실한 글꼴이다.
5.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미국 그래픽 디자인
미국은 유럽의 예술 방면 전문가들에게 매력적인 목적지였다. 스위스처럼 미국 역시 유럽에서 진행되었던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에서 비껴 나 있었고, 전쟁에 앞선 정치적 혼돈의 시기도 없었다. 그래픽 디자인에 한정 짓는다면, 미국은 전쟁 때문에 이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나치의 권력이 커지자 독일을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해외 이주를 고려하게 되었다.
5-1. 유럽 디자이너의 유입
: 헤르베르트 마터, 윌 버틴
스위스 출신 사진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헤르베르트 마터(Herbert Matter)는 1939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스위스 현대 사진 포스터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마터는 스위스 관광청을 위한 역동적인 모던 포스터 시리즈로 명성을 쌓았다. 신 타이포그래피의 추종자였던 윌 버틴(Will Burtin)은 1938년에 쾰른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년 후 첫 번째 작업으로 뉴욕 만국박람회 전시관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5-2.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 레스터 비얼, 브래드버리 톰슨, 앨빈 러스티그, 폴 랜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름을 날린 미국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 중, 모던 아트의 시각적 언어 사용에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네 명의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중 첫 번째로 레스터 비얼(Lester Beall)은 인터내셔널 페이퍼 컴퍼니와 제너럴 라이프 인슈어런스 그룹을 위한 CI 디자인 매뉴얼 작업은 1939년 그에게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 전시를 가진 최초의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두 번째로는 브래드버리 톰슨(Bradbury Thompson)이 있다. 그는 잡지 편집자 겸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재치 있는 사진 사용을 결부시킨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로 주목받았다. 세 번째로 앨빈 러스티그(Alvin Lustig)는 예일대학교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에 큰 힘을 쏟았다. 그는 모던 아트에서 영감을 얻은 도구들을 책과 잡지에 적용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가장 영향력 있었던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는 폴 랜드(Paul Rand)였다. 그는 IBM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 로고와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책임졌다. 그가 세계의 그래픽 디자인 분야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디자인 전문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5-3. 스위스 모더니즘을 해석하다
: 유럽 모더니즘을 다양하게 응용한 미국의 새로운 해석
작고 강한 사회적 원칙을 가진 스위스에 비해 광대한 토지와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은 유럽 모더니즘에 다르게 반응했다. 스위스는 광고를 공공을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광고는 유익하기만 한 것 이상이었다. 미국의 디자이너들에게 시각적 영감을 주는 근원은 더 넓었고, 신타이포그래피도 섭렵한 미국의 디자이너들은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소개한 다양한 시각적 장치들을 사용했다.
5-4. 표현주의 타이포그래피
: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와 독창적인 그래픽 디자인
20세기 후반에는 표현주의 타이포그래피를 기본으로 사용한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세 명은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로버트 브라운존은 1957년 이반 체르마예프(Ivan Chermayeff), 톰 게이스마(Tom Geismar)와 함께 파트너로 일했다. 이 그룹은 타이포그래피 실험과 독창적인 그래픽 상상력, 기억할 만한 기업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면서 명성을 높였다. 브라운존은 시카고 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에서 모호이너지에게 수업을 받았다. 1964년 영국에서 일하면서, 그는 영화 제임스 본드 시리즈 <골드핑거 Goldfinger>의 타이틀 시퀀스를 작업했다.
5-5. 모던 재즈의 시각화
: 리드 마일스
리드 마일스(Reid Miles)는 블루노트의 그래픽적 정체성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통해 모던 재즈의 본질을 시각화했다. 그는 사진을 잘라내거나 라인 드로잉을 응용해 제목용 글꼴로 단단하게 짜 맞춘 구성을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글꼴은 프랭클린 고딕체와 뉴스 고딕체 등 아메리칸 산세리프체를 주로 사용했고, 센추리체, 캐슬론체, 클라렌돈체도 자주 사용했다. 그는 1957년부터 블루노트 레코드(Blue Note Records)의 전속 디자이너로 일하며 15년 동안 강렬한 타이포그래피적 특성을 가진 음반 커버를 300장 가까이 디자인했다.
5-6. 허브 루발린
: 차가운 활자에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은 타이포그래퍼
허브 루발린은 매우 뛰어난 타이포그래피적 표현주의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다. 1939년 이후 루발린은 여러 광고 회사에서 일하다가 1945년에 뉴욕의 서둘러 헤네시사에 합류했고 1955년에 부사장이 된다. 그는 1964년 자신의 회사 루발린 사(Lubalin Inc.)를 차리기 위해 헤네시사를 떠난다. 루발린은 사진 식자기의 진가를 높이 평가했다. 금속 주조 방법에 비해 사진 식자기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에게 굉장한 융통성을 발휘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6. 옵티마 산세리프체
: 세리프체를 강렬하게 갈구하는 듯한 섬세한 산세리프체
헤르만 차프의 글꼴 디자인 대부분이 캘리그래피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20세기의 위대한 타입 디자이너 아드리안 프루티거와 비교된다. 프루티거의 디자인은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미적 관점을 알려주지만 차프가 영향을 받은 것은 손글씨가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르네상스 또는 그 이전 시기다. 차프가 디자인한 옵티마체는 다른 주조가들이 그들의 19세기 그로테스크체를 발전시키고 있었을 때 만들어졌다. 이 글꼴은 차프가 1950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4세기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나 피렌체 지방의 산타 크로체 성당 바닥의 비문을 보고 즉흥적으로 스케치한 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옵티마체는 당시 너무 실용적이거나(그로테스크체) 너무 문학적이지(세리프체) 않은 모습으로 인정받아 성공할 수 있었다. 기계시대에 그려진 산세리프 형태와 르네상스 시대의 펜으로 그린 세리프 형태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산세리프체를 만들어냈다. 2002년에 헤르만 차프는 고바야시 아키라와 함께 현존하던 옵티마체를 재디자인하고 확장시켰다. 새로운 모음은 옵티마 노바체(Optima Nova)라는 이름을 붙여 구분한다.
7. 기술의 발전
7-1. 활판인쇄에서 옵셋인쇄로
1960년대는 인쇄산업이 활판인쇄에서 옵셋인쇄로 바뀌게 되는 급진적 기술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20세기 초의 인쇄 방법은 활판 인쇄, 옵셋 인쇄, 그라비아 인쇄, 프로세스 스크린의 네 가지이다. 활판인쇄는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인쇄 방법으로 500년간 지속적으로 사용한 주된 인쇄 방법이었다. 옵셋인쇄는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고안된 평판인쇄법(planographic printing)이다. 평판인쇄는 원래 돌로 만들어진 거의 평평한 표면을 이용해 인쇄하는 방법이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이 원리는 광화학적 공정을 거치는 오늘날의 옵셋인쇄와 동일한 방법이다. 전통적으로 옵셋인쇄는 활판인쇄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드는 방법이었지만, 활판인쇄는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 제약이 너무 많았다. 옵셋인쇄는 그림 인쇄에 특히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활판인쇄에 비해 하프톤 사진을 좀 더 저렴한 종이에 인쇄하고 삽화와 텍스트를 같은 페이지에 인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책을 더욱 저렴하게 만드는 동시에 유연하게 디자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다른 인쇄 방법들은 더욱 전문화된 방법이었다. 그라비아 인쇄는 음각 인쇄의 과정으로 이미지가 구리판이나 실린더의 표면에 새겨질 때 작은 점들이 모인 격자처럼 새겨지기 때문에 사진을 재현해내는 것이 굉장히 뛰어나다. 마지막으로 실크스크린 인쇄라고도 알려져 있는 프로세스 스크린 인쇄는 티셔츠처럼 비교적 적은 양을 인쇄하는 데 적합하다. 보통 포스터, 라벨, 메뉴판, 섬유 인쇄, 예술적 표현 등에 사용했다.
7-2. 금속 활자에서 사진 식자로
금속 식자기는 사진으로 식자를 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이 시스템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널리 퍼져 1950년대 후반기에는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주조활자 식자기와 같이 첫 사진 식자기는 제목용, 본문용 두 가지로 디자인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금속 식자기는 옵셋인쇄에 더 잘 맞는 새로운 기계로 대체되었다. 사진 식자기의 첫 세대는 주조활자 식자기를 변형한 것으로, 금속 주형을 네거티브 필름으로 변환하였다. 같은 시기에 20세기 전기 장치를 이용한 식자로 바꾼 포톤・루미 타입 기계가 등장했다.
1961년 IBM사는 낱자들이 줄지어 배열되어 있는 골프공 모양으로 된 글꼴들을 누르는 매우 색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발표했다. 이 골프공 모양 타자기는 빠른 시간에 글꼴과 글자 크기를 다양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일반적인 타자기와 같은 기능을 했지만, 굉장히 고품질의 바리타지 인쇄물을 만들어냈다.
7-3. 이후의 발전
1960년 후반 사진 식자기의 3세대가 CRT(Cathode Ray Tube; 음극선관) 표면에 활자를 구성시켜 브로마이드지에 진공관을 노출시키는 급진적인 새로운 기능과 함께 등장했다. 이후에는 디지털화된 글자를 도입하고 마그네틱 디스크에 이를 저장하게끔 발전하였다. 1976년에 모노타입 레이저콤(Monotype Lasercomp)이 사진 식자기의 네 번째 세대로 발표되었다. 레이저는 매우 고른 광선이기 때문에 사진용 재료에 굉장히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1983년에 헬륨 네온 레이저를 사용해 점 방식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진 식자기인 라이노트론 101(Linotron 101)이 발표되었다.
사진 식자기는 세 종류의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가 키보드 입력 유닛과 사진 식자 유닛이 합해진 하나의 유닛으로 구성된 직접 입력 방식으로, 소규모의 청부 인쇄업자들을 위한 방식이다. 두 번째는 오프라인 시스템으로, 많은 수의 연결되지 않은 유닛들로 구성되어 시각적으로 표시된 키보드 유닛으로 마그네틱 테이프, 플로피 디스크 등에 결과물을 저장하거나 사진 식자 유닛으로 옮겨주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온라인 시스템이다. 중앙부에 사진 식자 유닛이 케이블로 모두 연결되어 있는 여러 개로 분리된 키보드 입력 유닛과 시각적 표시 유닛들로 구성되어 있다.
8. 아드리안 프루티거와 프루티거체
: 클래식과 모던이 공존하는 고전적 산세리프체
아드리안 프루티거의 위대함과 명성은 헤아릴 수 없지만, 최대 업적은 유니버스체와 그의 이름을 딴 산세리프인 프루티거체에 있다. 프루티거체는 원래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Charles de Gaulle Airport)을 위해 개발되었다. 프루티거는 그가 개발한 유니버스를 활용하지 않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서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고전적인 느낌의 디자인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시도'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프루티거체는 중립적이었던 네오 그로테스크체에서 벗어나 길 산스체와 같은 인본주의적 산세리프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프루티거는 글꼴 디자인 외에도 공공을 위해 사용하는 글자 체계와 알파벳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요약>
막스 미딩거(1910~1980), 헬베티카체(1961)
- 스위스 국제 스타일의 기준이 된 서체
- 중립적, 안정감, 정확함, 신뢰감
스위스 국제주의 스타일
- 구성주의의 영향으로 형성
- 객관적이고 체계화된 디자인과 통일성 중시
프랑스의 스위스 디자이너 - 장 위드메르
독일 실천 주의자들 - 오틀 아이허, 빌리 플렉하우스
- 오틀 아이허: 1972 뮌헨 올림픽 그래픽 아트디렉터, 로티스체
- 빌리 플렉하우스: 청년문화 잡지 <트웬> 아트 디렉팅
영국 - 허버트 스펜서, 앤서니 프로샤우그
- 모더니즘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 <타이포그래피카>
네덜란드 - 더 스테일과 토탈 디자인
-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최전방
- 바우하우스와 긴밀한 영향력
- 국제주의 양식이 나타난 디자인 컨설턴트 토탈 디자인
미국 그래픽 디자인의 발달
-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에 유럽의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미국으로 이주
- 유럽 모더니즘을 재해석한 역동적이고 모던한 그래픽 스타일로 광고에 활용
-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주의 타이포그래피
-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레스터 비얼, 브래드버리 톰슨, 앨빈 러스티그, 폴 랜드, 허브 루발린
헤르만 차프 (1918~2015)
- 팔라티노체 (1948) : 단단한 균형미와 뛰어난 가독성, 절제되고 모던한 형태
- 옵티마체 (1958) : 르네상스 시대 로마 비문에서 영감을 얻은 섬세한 산세리프체
아드리안 프루티거 (1928~2015)
- 유니버스체 (1957): 숫자 시스템으로 폰트 굵기 체계화
- 프루티거체 (1976): 샤를 드 골 공항을 위한 서체, 고전적 산세리프
기술의 발전
- 20세기 초 인쇄 방법: 활판 인쇄, 옵셋 인쇄, 그라비아 인쇄, 프로세스 스크린
- 활판 인쇄에서 이미지 인쇄가 유리한 옵셋 인쇄로
- 금속활자에서 사진 식자로: IBM의 사진 식자기 타건 시스템(strike-on system)
참고 서적
로빈 도드, 『타이포그래피의 탄생』, 홍시&홍디자인(2010), p262~344
참고 자료
타이틀 이미지- Gary Hustwit, 영화 '헬베티카'의 한 장면, https://www.hustwit.com/helvetica
font.co.kr스토리, "[영문 폰트] 숫자 시스템으로 굵기 분류한 첫 산세리프 서체, 유니버스(Univers), https://fonco.tistory.com/12
브런치, "Palatino", https://brunch.co.kr/@nitro2red/68
myswitzerland, "폰트레지나(Pontresina)" 포스터, https://www.myswitzerland.com/ko/experiences/cities-culture/art-culture/art/pontresina/
designDB,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거인 폴 랜드(Paul Rand)", http://www.designdb.com/?menuno=680&bbsno=77&act=view&ztag=rO0ABXQANzxjYWxsIHR5cGU9ImJvYXJkIiBubz0iNTg1IiBza2luPSJwaG90b19uYXRpb24iPjwvY2FsbD4%3D
타이포그래피 서울, "[서체 이야기] 프랑스의 얼굴이 된 서체, '프루티거(Frutiger)'", http://www.typographyseoul.com/news/detail/935
EBSi, "1945년 이후의 디자인"
중앙일보, "잡지 '트웬'으로 저항문화 꽃피우다" , https://news.joins.com/article/7834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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